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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22 개인전(적_cumulation) 전시서문

글: 최연하 (독립 큐레이터/미술비평)

 

김민호의 적적(積迹)한 풍경

 

대안공간 SPACE22 중진작가 지원전시 열한 번째로, 김민호 개인전 <적(積)>을 기획한다. 이번 전시는 사진과 드로잉, 페인팅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근래 왕성하게 활동 중인 김민호의 신작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웹상에 떠도는 수많은 사진이미지를 쌓은(積) 세계 도시의 랜드 마크들과 목탄 드로잉의 자취(迹)를 보여주는 풍경이미지로, 채집한 사진과 목탄의 물리적인 변화의 흔적을 좇으면서 본다는 것과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기억과 시간의 관계들이 고요한 긴장을 이룬다.

김민호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드로잉의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다고 말한다. 카메라가 놓칠 수 있거나, 대상 앞에 분명히 실재했으나 작가-주체가 보지 못했던 것을 이미지를 쌓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카메라의 인식론적 관점(기술 결정주의, 대상주의)보다 존재론적 관점, 즉 작가와 사진이미지와의 관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어떠한 가능성들에 주목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진이미지를 계속 쌓거나 흐리게 하고, 드로잉을 지우거나 그리기를 반복하는 행위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행위-과정의 반복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에 새겨진 흔적으로서의 기억이나 지나간 시간의 이미지, 다가올 일에 대한 예견이 한 화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게 하는 것은 무한한 반복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작가가 이번 전시 타이틀로 채택한 ‘적(積)’이라는 한자어가 함의한바, 정지된 화면 속에는 ‘쌓고, 머무르고, 울적한’ 움직임과 함께 ‘자취, 주름’이라는 아날로그의 공존을 볼 수 있다. 보는 행위와 그리는 동작, 그 후에 남은 흔적으로 이뤄진 것이 김민호의 신작, <적積>이다. 

특히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니라, ‘구글링’을 통해 떠도는 이미지를 수집 하고, 중첩시키면서 흐리게 하는 것은 사진이미지의 신화적인 요소들을 전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실을 재현하는 사진가-주체의 견고하고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다양한 이미지에 ‘접속’하여 소실점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이처럼 어느 장소에서나 서로 관계하며 공간과 시간이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는 ‘디지털리좀’의 네트워크를 김민호의 ‘사진행위’에서 엿볼 수 있다. 국가마다 기억해야 할 기념비적인 장소에 접속한 작가는 특정한 곳에 뿌리 내린 랜드 마크(land mark)들을 해체하며 새로운 땅에 흔적(mark)을 내고 있다. 중심과 통일과 독점과 점유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들은 변화와 탄력을 예고하는 선형적 다양체들로 유동하며 기입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이미지가 컴퓨터에 의해 생산된 디지털 사진 이미지라면 이-미지(未知)의 것들 속에서 이미지와 함께 유희하려는 작가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이미지를 네트워크상에서 무제한 가질 수 있다면, 새로운 접속을 통해 확장이 가능한 디지털리좀은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새로운 탈주를 제시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한 점의 목탄 드로잉을 다시 보게 된다. ‘Sewol'이라는 타이틀의 이 작업은 현재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과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기억하고 기다리게 한다. 떠도는 사진이미지들의 축적이 아닌 작가의 눈과 손의 기억으로 이뤄진 기다림-기억의 흔적-이미지이다. 지나가는 것이 아닌 아직도 머무른 채, 켜켜이 쌓은 울적한 ‘적’의 시간. 시간의 역순으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아직도 아닌’, 미래의 현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개념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Sewol'의 형상이다.

들뢰즈&가타리의 말처럼 “리좀은 어떤 다른 점과도 접속될 수 있고 접속되어야 한다.” 기억의 다발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룬다면, 역으로 고정되고 통일된 일점 원근을 해체하여 변화의 내재성을 형성할 수도 있겠다. 기억의 자기 동일적인 상태를 벗어나 끊임없이 바깥으로 향하고 하이퍼링크(Hyperlink)를 걸기. 그것이 하나의 미디어가 아닌 다른 미디어로 연결하며 쌓고 지우고 다시 그리는 행위를 통해 김민호가 시도하려는 것이다. 기다리고 주의를 기울이며,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과거를 불러오고 미래의 자취를 예견하는 일. 그 무한한 반복이 바로 ‘주름’을 이루니 이번 김민호의 개인전 <적積>은 작가의 작업 형식과 내용을 순연하게 아우르는 전시라 할 만한다.

월간미술 2014년 12월호 한벽원 개인전 리뷰

글: 김상철(미술비평/동덕여대 교수)

 

김민호 (시점-연속된 시간의 지점)

 

작가 김민호의 작업은 다양한 시점의 중첩에 따른 이미지의 변용을 기본으로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동양회화의 이동시점과 카메라를 통한 고정시점의 대비와 충돌이라는 상이한 가치의 반복적인 중첩을 통한 대상의 해석이다. 이는 단순히 시점의 중첩에 따른 형상의 변화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의 이상적 시각을 아날로그적 감성의 조형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간(看)’은 디지털적 시각이고 ‘관(觀)’은 전통적인 아날로그적 관찰법이다. 그는 무수한 ‘간’의 시점을 중첩함으로써 이를 ‘관’의 시점으로 변환기키고 있다. ‘간’이 대상의 객관성과 구체성에 주목해 그 깊이에 주목하는  것이라면 ‘관’은 공간의 확장에 주목한다. 이른바 원근이나 투시는 바로 ‘간’의 시각을 화면에 효과적으로 구현하여 종심적인 깊이의 공간감을 구현하기 위한 조형적 장치이다. 이에 반하여 ‘관’의 시점은 좌우, 상하의 전개를 통하여 평면적으로 공간을 확장시킨다. 작가의 화면이 규격화된 형식을 취하지 않고 다양한 변용을 취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장소를 이동해가면서 시점을 변화시키며 대상을 기계적 시각으로 포착하고, 이를  중첩시킴으로써 그 잔상을 통해 형상을 구현해가는 그의 작업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물리적으로는 대단히 기계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대상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극히 모호하고 다중적인 잔상들로 표출된다. 그가 주목하는 두 가지 상이한 가치의 시점 충돌과 같이 화면의 형상들은 ‘허(虛)’와 ‘실(實)’이 교차되고 변환되며 거대한 잔상들로 표출된다. 견고하고 깊이 있는 화면은 바로 다양한 시점의 반복적 중첩을 시행한 결과물이다. 특정한 대상을 중심으로 시점을 이동하며 수 차례에 걸쳐 그리고 지우며 그 내용들을 반복적으로 중첩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전적으로 아날로그적이다. 목탄과 손과 같은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첨단의 기계적적인 내용들을 수렴해내는 그의 작업방식은 재치나 기요에 앞서 일종의 본질에 육박하고자 하는 의지로 읽힌다. 그의 화면이 비록 목탄과 콩테 등 다양한 혼합재료를 동원하고 있지만 깊고 그윽한 수묵의 그것으로 읽힌다. 이는 단순히 그의 화면이 수묵과 같이 흑백의 무채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백에 대한 조형적 효과를 십분 발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의 화면을 수묵으로 읽는다는 것은 지나치게 전통적이고 강박적인 읽기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화면은 분명히 수묵의 사상과 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이 여실하다. 육안에 의한 대상의 객관성은 소실되고 거대한 잔상을 통해 대상을 ‘허’의 공간으로 변환기키는 그의 화면은 분명 수묵의 그것과 매우 근접해 있다.

 전통과 현대는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이지만 여전히 한국화의 화두처럼 제시되고 있다. 그간 적잖은 실험이 이러한 가치로 포장되거나 윤색된 바 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매우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헤 둔다면 작가가 보여주는 시점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이의 조형적 표출은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적어도 그의 작업은 이미 제시된 화두에 일정한 답할 거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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